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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모습

돌아가신 할아버지 얼굴을 사진으로 처음으로 보았다. 할아버지의 얼굴은 누가 봐도 무서운 사람이었다. 

기로 사람을 누른다는 게 이런 사람한테 쓰이는 말일까, 사진으로 넘어오는 할아버지의 포스는 남달랐다.

 

아이러니한 건 할머니의 평가로는 자식들 중에 외향적인 모습으로 할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 우리 아빠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사람들이 아버지의 첫인상을 보면서 종종 무서웠다는 말을 듣곤 했지만 우리 아빠라서 그런지 이제까지는 공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사진을 보고 난 후, 아빠의 얼굴을 보니 아빠는 무서운 얼굴이 맞다. 처음으로 공감해봤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 아버지는 사실 무서운 인상이다.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할머니를 모시고 식사한 자리에서 할머니를 통해 할아버지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할아버지의 성품은 곧으셨다고 하고, 머리는 매우 똑똑하며, 검소하였고, 힘이 세서 싸움을 하면 그 누구한테도 지지 않았다고 한다. 남들에게는 의리를 지키며, 선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가정폭력가였다. 할아버지는 부인들과 아들들에게는 함부로 대했다. 이전에도 들었었지만 아빠가 당한 폭력은 감히 상상조차 못 한다.

교회 간다고 때렸고, 어린 아버지를 혁대로 목을 졸라서 천장에 매달아놓기도 하셨다고 한다.

익히 할아버지가 자식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건 알고 있었지만, 부인들에게도 폭력을 행사했던 할아버지를 할머니를 통해 처음 들어봤다. 

우리 할머니는 여자의 인생을 할아버지에 의해 유린당하셨다고 한다. 원치 않으신 결혼이었고, 할아버지한테 폭력을 당하면서도, 자식들 때문에 도망가지도 못했다고... 그리고,  폭력으로 인해 몇 번의 유산을 경험하셨다고 한다.

 

예전에 아버지의 대리운전을 부탁하여 내가 운전을 하고 있었을 때, 옆자리에서 취한 아버지가 하신 말이 기억난다.

"20살 때 아빠의 소원은 할아버지가 죽는 게 소원이었어"

이 말에 운전하면서 눈물이 그렇게 났었는데, 할머니가 하신 말로 인해서 아버지의 심정이 더 실감이 났다. 얼마나 할아버지에 대해서 분노하셨을까.

 

할머니의 말을 이어가며 아버지는 나에게 말하셨다.

 

"내 밑으로도 동생들이 더 있을 수도 있었지, 그리고 어쩌면 나도 태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어"

 

종종 아버지께서는 자신은 실수로 태어났다고 말하긴 하셨다. 그리곤 곧장 이 말을 뒤에 이어 붙이셨다.

 

"그게 하나님의 은혜야, 할머니를 통해 내가 태어나고, 규성이 보은이 준수가 태어나서, 하나님 믿을 수 있었잖니"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말에 아버지의 삶이 대단해 보였다.

 

보통 아버지가 폭력적이면, 다음 자식들도 폭력적일 확률이 높다는 연구결과가 있는데,

우리 아버지는 나에게 손지검 비슷한 것을 한 번도 행사한 적이 없으며, 욕설조차 나에게 사용해 본 적이 없다.

항상 "규성아 힘내", "규성아 사랑해", 용기를 북돋아 주실 뿐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대단하다. 대단한 삶을 살고 계셨던 것이다.

 

동시에 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경험하고 있다.

 

누군가 그랬다. 하나님이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날 사랑하셨다고. 

머리로만 알고 있던 이 말이 이젠 나의 경험이 되었다.

 

하나님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날 사랑하시어서, 아버지를 유산으로부터 보호하셨고, 아버지가 어머니를 만나게 하사 나를 낳으셨다. 그렇게 하나님은 세밀한 계획 가운데 역사하셨다. 나를 사랑하시려고, 그리고 나를 통해 영광 받으시는 것을 기뻐하시려 나를 향한 계획을 세우시고, 나를 보호하시고, 지금도 역사하고 계신다.

 

이 사실을 알고 나니, 내가 하나님 백성이란 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모른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날 사랑하신 하나님... 그 말이 내 것이 되니, 이 감격을 주체할 수가 없다.

내가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기적인데,  할머니가 믿어왔던 하나님, 아버지가 믿어왔던 하나님, 어머니가 믿어왔던 하나님. 그 하나님을 내가 믿고 있는 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어떠한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가. 

 

 

부모님으로부터 믿음을 전수받는다는 것은, 사실은 대단한 거였다.

믿음의 가정에서 물려받는 신앙. 그건 어떠한 유산보다도 가치 있는 거였다.

 

옛날부터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가는 것에 소망이 있었는데, 이번 계기를 통해서 더 갈급해졌다.

물려받은 이 믿음 잘 간직하여, 발전시켜서, 꼭 내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고 싶다. 내 자식이 하나님의 감격을 누리며 사는 삶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내 다음 세대에게 이 말에 나의 진심을 담을 수 있음에 감사하다. "하나님은 너를 태어나기 전부터 사랑하셨단다"

 

 

 

 

요한복음 18:19-27

 

예수님께서 불법재판을 당한다. 증인도 없고, 유도심문에 싸대기까지 맞았다.

 

영화 '변호인' 이 생각났다. 악역들이 죄없는 사람들을 데려와 폭력을 휘두르면서 여럿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불의에도 당당하셨다. 지은 죄가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지은 창조물에게 창조자 예수님이 자신의 뺨을 맞았을때의 기분은 어땠을까 묵상해본다.

진짜 기분 더럽지 않았을까.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러한 모진 고난을 참으셨다. 참 사랑..

 

오늘 느낀점은, 나에게 불의가 찾아올수도있다. 이 상황을 대비하는 방법은 내가 떳떳하게 사는것. 

 

주님. 내가 떳떳하게 살 수 있게 하소서. 공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시편기자처럼 주님께 나의 억울함을 아시고 의인을 위해 일해주심을 믿습니다. 그런 상황이 닥쳐올 때 담담하게 이겨낼 수 있게 하소서.

 

하나님은 요즘 내가 속한 단체들을 통해 나에게 말씀하신다.

 

이렇게 일관될 수가 없다.

 

DFC의 루틴QT도 오늘 새로 시작한 청년부의 제자훈련도

'오늘 하루 나와 함께 교재하는 삶을 살았니?'

'오늘 내가 선물한 하루에 계획적이고, 최선을 다한 삶을 살았니? '

 

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나는 '아니요...' 라고 대답한다..ㅋㅋㅋ

 

박사과정에 오고나서 내가 안주한 삶을 살고 있으니, 자꾸 내가 속한 단체들을 통해 하나님이 날 체계적인 삶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훈련시키는 듯 하다.

 

신기한것은, DFC와 교회에서 하는 각각의 프로그램이 서로 상호보안을 해주어서 완성도가 증가했다(그렇다고 내가 이 프로그램들을 잘 하고있다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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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교회 청년부에서 제자훈련이 시작했다.

 

할일이 너어어어어무 많아 부담도 많이 됐지만, 사실 뒤에 앉아서 혼자서 설레고 있었다.

 

제자훈련을 통해 사랑의교회 청년들이 봉사위주의 신앙생활에서 조금은 벗어나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을 묵상할 수 있는 첫걸음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QT, 4장성경읽기, 독후감, 기도, 구절암송 등등.. 해보지 않았던 청년들에게는 쉬운것은 아닐것이다. 대학교시절 선교사님 앞에서 하기 싫다고 펑펑 운적도 많으니.. 학부생때 많은 훈련을 받고도 결국 남은 하나는 QT묵상이지만, 그거라도 붙잡을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이번 제자훈련을 통해 청년들이 봉사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 만큼, 하나님과 교재하는 시간을 우선순위에 둘 수 있는 청년부가 되길 기대해본다. 또한, 주어진 하루에 최선을 다한 삶을 살아서 하나님 기쁘시게 해드리는 날을 기대해본다.

시편 8:1-9

 

시편 8: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우주의 창조자임을 언급하고 있다. 오늘의 큐티 제목처럼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을 본다.

 

시편 8: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렇다면 우주에서는 인간은 어떤 의미일까.

 

최근 우주의 크기를 알려주는 한 커뮤니티를 보았다. 상대성이론을 발견한 아인슈타인은 우리 은하계 정도만을 생각했지만 현재 측정 가능한 수치는 우리 은하계에서 465광년을 더 하고도, 계속 지금까지도 팽창 중이라고 한다. 

 

이렇게 인간은 작고 작은 존재이다. 우주적으로 볼 때는 우리는 하나의 먼지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이 우주를 만든 하나님이 사람이 무엇이 간데 사람을 사랑하시고, 사람을 돌보신다.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한테서 중요한 것일까.

 

그 사실을 깨달은 화자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의 이름에 아름다움,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에 아름다움을 선포한다.

 

주님 기도드립니다. 주님께서 주신 삶, 이 삶을 살아가면서 주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하시고, 주님이 나를 돌보신다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게 하소서, 주님의 아름다움 깨닫길 원합니다. 나만의 시편으로, 나만의 기도로, 주님께 내 마음을 올려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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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1-12

 

어제 제목이 복된 길, 헛된 길이였는데 오늘도 비슷하게 복된 인생, 헛된 인생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방법으로 하나님과 언약백성들의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이 관경을 보시고 웃으신다라고 하였다.

 

시편2:4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왜 하나님께서 웃으심이 자꾸 상상이 되는걸까

 

너까짓게 나와 나의 백성들의 유대를 끊을 수 있어? 라고 생각하시는거 같다. 너까짓게라는 말의 어감이 딱히 좋지는 않다만..

 

하나님은 창조자이시고, 인간은 창조물이다. 창조물이 절대 창조자를 넘어 설 수 없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과 때어놓기 위한 수단과 방법들은 헛된 인생임을 제목에서 말해준다.

 

그렇다면 복된 인생이란 무엇일까?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되심이 복된 인생이다.

 

시편 2:7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또한 나를 깨트릴 자들,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 나를 괴롭히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시편2:9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오히려 대적할 힘을 주시고, 그렇게 명령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참 복된 인생을 받아간다.

 

시편2: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할렐루야. 주님을 즐거워할지로다. 주님을 찬양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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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1-6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청소년기 시절에 어머니께 성경 어디를 읽어야 하냐고 물어보면, 시편 잠언을 추천해주셨다. 그때에는 이 부분들을 왜 추천해주셨지 라는 생각이었으나, 20대 후반으로 들어오는 지금 세월을 조금 먹었는지 읽을 때마다 잔잔한 감동을 준다. 

주일학교 수련회에서는 외워야만이 밥을 먹을 수 있기에 어쩔수 없이 뇌에 박히게끔 외웠지만, 지금에 와서는 시편 1편을 자발적으로 외워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다. 

 

사람들이 시편을 외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말씀을 붙잡고 싶기 때문에 외우는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나는 악인의 길에 따르지 않길 원하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고 싶다. 20살 초반, 나는 사회에 나가면 크리스천답게 모든 것을 정직하게 하여 주님을 따라야지 하였지만, 정작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삶, 타협하는 삶을 살고 있는 듯하다.

 

주의 율법을 즐거이 묵상하는 것. 하나님과 깊은 교재를 나누는 것. 그분의 뜻을 알아가는 것. 이게 복이다. 

 

자신의 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누릴 수 없는 복, 악인의 길을 따르기 위해 항상 분주해하는 이들에게는 누릴 수 없는 복. 바로 주님을 묵상함이다. 늘 감사하며 그 삶을 누리는 삶. 

 

세삼스례 당연하다고 여겨진 잊어버렸던 감사함이 자연스럽게 다시 터져 나오는 그런 큐티였다.

 

한줄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과 교재하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요. 이 삶을 누리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또한 주야로 묵상하며 주님과 더 깊어질 수 있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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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정답이 아니다. 공동체의 찬양단 리더라면 한번쯤 고민해 볼 수 있는 생각들을 적어본다. 수도권 혹은 대도시처럼 음악전공자들이 많은 곳이 아니라, 평범한 지역교회임을 가정한다. 사실 내가 경험한 곳은 여기 뿐이다

교회 찬양단의 맴버들이 어떻게 해서 찬양단에 들어오게 됬는지에 대한 분석을 해본다. 이들이 타의에 의해 참여와 자발적인 동기에 의한 참여로 나뉠 수 있게 된다. 나는 이를 “수동적 참여”와 “능동적 참여”라고 나누어보고 싶다.

“수동적 참여”의 끝판왕은 피아노 반주자들이다.

보통 어중간한 크기의 교회에서는 피아노 반주자를 키워내는 것이 참으로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예배와 행사는 많아서 각 예배마다 반주자가 필요하다만, 지역교회의 반주자 공급은 항상 부족하니 몇 없는 반주자들이 돌아가면서 반주를 맡게된다. 또 이런 유형의 반주자들은 주일학교에서부터 오랫동안 해왔던 지체일 가능성이 크다. 어렸을때부터 계속해서 피아노 반주를 맡다보면, 어른들에게 눈에 띄게 되고, 예배든 행사든 반주가 필요해 반주자들에게 요청이 들어오면 어른들의 부탁이므로 쉽게 거절할 수 없게된다. 피아노 반주 요청을 하는 입장에서는 반주자가 영적으로 육적으로 어떠한 상태인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다. 또한 요청하는 쪽이 한둘이 아니니, 반주자들이 요청을 수락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피로가 누적되고, 아무리 영적으로 충만한 지체더라도 이러한 육적 스트레스가 영성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이 악순환이 끊어지지 않는다면 결국 번아웃은 시간문제이다.

우선 나는 이런 유형의 지체들에게 진심어린 감사를 표한다. 어쨋거나 저쨋거나 순종의 자리에 나아갔다라는 것, 나의 상태보다 공동체를 더 우선시 여겼다는 것에 대단함을 느낀다.

그러니 찬양단 리더는 악기 연주자들이 악순환에 빠지지 않게 지도해주는 역할이 되어야 한다. 나는 그래서 관심의 일순위를 피아노 반주자에 둔다(당연히 피아노 반주자 이외에 대체자가 없이 악기로 계속 헌신하는 지체들에게도 관심을 주어야 한다). 반주자의 상태가 어떤지, 무슨 고민이 있는지, 늘 관심을 갖고 이 지체의 맴버쉽을 형성하려 애쓴다. 그래야 혹시나 번아웃이 찾아왔을때, 혹은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에 리더로서 그 고민을 들어주고, 공감해줌으로써 위기를 잘 극복할 수 있게끔 해야한다. 좀더 근본적인 악순환 해결방법은 나중에 더 생각해보겠다.

“능동적 참여”를 한 지체들을 대할때는 동기가 중요하다. 예배 위원으로서 하나님께 더 헌신하고 싶은 마음, 하나님께 찬양 올려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첫번째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이 마음이 전부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친한 친구가 찬양단에 있어서 일수도 있고, 교회의 공동체에 속하고 싶어서 일수도 있고, 찬양단에 좋아하는 지체가 있을 수도 있고, 나의 은사를 자랑하고 싶어서 일수도 있다. 누구는 이러한 동기가 불순하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동기가 어쨌든 찬양단 안으로 들어왔다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찬양하는 마음을 주었다라고 생각한다.

또 이런 “능동적 참여” 친구들은 욕심이 많다. 나의 은사를 뽐내고 싶어하니, 절제하지 못할때가 많다. 싱어라고 한다면 불필요한 화음을 낸다던가, 전체에 어울리지 않는 튀는 소리를 내기도 한다. 악기를 연주하는 친구들은 찬양중에 실험을 한다. 물론 여런저런 방법을 시도하는 것은 옳으나 지나쳐버리기 일수라 어울리지 않을때가 많다. 무엇인가 색다르게 연주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큰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찬양단 리더는 이러한 “능동적 참여” 친구들에게는 공동체와 함께 하나된 마음으로 찬양할 수 있게 방향설정을 잘 지도해주어야 한다. 우선 이들의 시선을 ‘자기자신’보다 ‘공동체’에 시선을 두게끔 해야한다. 사실 이런 지체들은 지적당하면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간다. 그렇기에 지도를 할때에 “너 혼자 소리가 너무 커 줄여”, “너 거기서 이 연주 애드립 이상해 빼”라고 지체에 대해 지적하기 보단, “싱어들의 소리와 어울리게 조금 낮춰주세요” 나 “이 곡에는 좀 더 담백하게 연주하는 부분이 좋을 거 같습니다.”라고 계속 공동체 의식을 넣어줄 필요성이 있다. 열성이 있는 친구라고 한다면 오히려 한 파트를 연습시키는 방향으로 지도해주는 편도 좋은 방법이다.

사실 모든 결론은 ‘기도’가 답이다. 리더라면 자신에게 맡겨진 영혼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며, 관심의 표현은 기도가 된다. 이 친구의 영성을 책임져주세요, 이 친구가 힘들어합니다 도와주세요. 이 친구가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한채로 찬양합니다, 주님께서 만나주세요 등등. 영혼 하나하나에 대한 관심과 기도가 필요하다.

결론 : 기도하자!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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